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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 무시한 보편성은 남성성의 다른 이름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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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작성일 23-08-25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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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 무시한 보편성은 남성성의 다른 이름일 뿐

 


종의 기원을 쓴 다윈이 살아 있다면 남녀동수운동이 주장하는 ‘인류는 둘’이라는 종의 이원성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 찬성? 반대? 아님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귓등으로 흘려버릴까?

알 수 없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생물학적으로 여성과 남성은 서로 다른 생식기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과 남성은 다르다는 것이다. ‘인류는 둘’이라는 종의 이원성은 여성과 남성의 다름에 대한 인정을 통해 공적인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시민으로서 같은 자격과 권리를 부여하기 위한 정치적 기획의 일부분이지 학술적이고 이론적 성과물이 아니다.

남녀동수운동이 인류는 남성과 여성, 즉 둘이라는 종의 이원성을 주장하는 것은 여성과 남성은 다르다는 차이를 단순히 강조하고 재천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도 프랑스 보편주의에서 상정하는 공적인 영역에서 시민이 될 수 있는 자격인 추상적 개인이 되고자 함에 있다. 남성과 같은 자격을 가진 공적인 존재로서 여성의 지위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즉 다름의 인정을 통해 같음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공적인 영역에서 시민이 될 수 있는 자격인 추상적 개인은 이미 유성의 추상적 개인이므로 시민적 권리 또한 성차가 반영된 권리의 실현이 이뤄져야 한다. 선거권이 남녀 모두에게 주어지듯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권리 또한 남녀에게 동등하게 부여돼야 한다는 것이다.

추상적 개인과 보편적 인간성을 강조하는 곳에서는 인종, 종교, 문화, 성 등과 같은 다양한 특수성과 차이가 무시되고 은폐된다. 차이를 무시하면서 주류 집단의 관점과 경험을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위장하고 정당화한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 즉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보편성과 추상적 개인과 시민적 권리는 남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남성의 권리와 이익을 배타적으로 실현하는 반면 여성의 경험과 목소리와 권리는 주변화되고 무시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 보편성은 남성적 권리와 관점만을 반영한 것으로 진정한 의미의 보편성이 아닌 허구적 보편성, 즉 남성적 특수성에 지나지 않는다.

남녀동수운동은 이렇듯 여성 차별의 원인이자 기제로 작동하는 보편주의와 추상적 개인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추상적 개인이 중성적 존재 혹은 무성적 존재가 아닌 유성의 존재, 남성과 여성이라는 특수성을 가진 존재들임을 인정하고 이에 기초해 공적 영역에서 각각의 경험과 관점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녀동수운동과 보편주의의 차이는 성의 차이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에서 비롯된다. 보편주의자들에게 있어 성차는 제거될 수 있는 혹은 초월될 수 있는 차이로 인식된 것에 반해 남녀동수운동가들에게 있어 성차는 제거될 수 없는 혹은 초월될 수 없는 차이, 즉 인간 종의 이원성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남녀동수운동에 있어 성의 차이는 여타의 인종적·문화적·종교적 차이와는 다른 수준의 것으로 인식된다. 여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다양한 인종, 종교, 문화, 민족 등 모든 영역과 집단에 존재한다. 여성은 모든 사회적 집단과 범주를 가로지르는 횡적인 존재이므로 여성이라는 공통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한다. 단지 여성은 남성과 더불어 주권을 가진 시민의 절반, 인간 종의 절반을 구성할 뿐이라고 한다.

이처럼 어디에나 있는 여성이 유독 그곳, 공적인 영역에는 없다는 것에서 남녀동수의 문제의식은 출발한다. 대표자가 될 수 있는 동등한 권리, 즉 남녀동수는 여성이라는 특수한 집단의 이해가 아니라 인류의 절반인 여성들의 다양한 이해, 즉 종교적·인종적·계급적·문화적 등등의 이해와 경험을 반영하는 길이 된다. 남녀동수야말로 진정한 보편성의 실현임과 동시에 대의 민주주의가 맞고 있는 위기, 즉 대표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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